#action Blog 블로그 더하기 ##Blog {{{#!blog hyacinth 2025-01-17T16:33:19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믿음으로 강한 망상과 확신에 사로잡혀 엄청난 짓을 벌이는 사람과 그 집단들을 보면서 그들이 현실로 돌아오도록 돕기 위해서는 신뢰 관계 형성, 사회적 접근, 심리 상담, 의료적 접근 방법 등이 있겠지만 나는 요즘 수백 년 전 근대 철학에서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던 *이성*, *자유의지*, *주체성* 철학적 접근을 떠올린다. 특히 확신과 신념이란 주제를 다룰 때, 인간의 사고 체계, 진리 탐구, 그리고 극단적 믿음의 위험성을 다루는 철학자들이 많았다. 나는 최근 인류 사회가 정보 사회를 겪으며 스파이럴하게 조금씩 안 좋은 방향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데 수백 년 전 *계몽운동*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데서 어떤 실망감을 느낀다. 칸트는 1784년에 쓴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에서 계몽운동의 모토는 "자기 자신의 오성(悟性)을 사용한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오성'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모토를 쉽게 말하면(넓은 의미에서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가지라'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칸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독려했다. 스스로 생각한다? 그거 쉽지 않나요? 거기에 용기라는 말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나요?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 정말로 쉬운 일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칸트가 태어나기 약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론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베이컨은 학문과 기술에 큰 혁신을 이루고 싶어 했고 그러한 혁신의 출발점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idola) 즉, 선입견과 편견을 씻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입견이 있으면 어떤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붐 오르가눔(1620)> 등에서 우상을 비판했다. 베이컨이 말한 네 가지 우상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는 '종족의 우상'으로, 인간 정신의 습성 같은 것이다. 어떤 일을 미리 단정 짓고 단순화하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자기 생각에 이끌려 많은 것을 놓친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이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으로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무엇을 선호하는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며 이러한 성향에 따라 우리의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인데 사람들이 나누는 말이 정확히 정의되지 않아서 발생한다. 베이컨은 이것이 가장 성가신 우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부적절한 언어 사용이 우리 사고에 미치는 폐해가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때로는 '학설의 우상'이라고도 부르는데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에 아름다운 결말이 있는 것처럼 철학적인 토론을 할 때도 요령껏 마무리하면 사람들을 속이는 토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는 쉬울까? 베이컨이 지적하듯 우상은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주며 또 지배한다. 이를 없애지 않으면 새로운 배움을 시작할 수 없다.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자신의 우상을 이해하고 미리 바로잡을 수 있을까? 세상에 알려진 것에 기대지 않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까? 즉, 선입견 없이 생각할 수 있는 걸까?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으면 '스스로' 생각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왜 '용기'가 필요할까? 선입견을 따르지 않고 굳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 그 정도라면 '용기'라는 단어까지 쓸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자. 다른 이들을 자기 생각대로 조정하려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압력을 가한다. 이들을 물리치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배운 모든 선입견을 없앴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스스로 만든 습관과 지금까지 받아온 모든 교육까지도 의심할 것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안정된 일상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진짜와 가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애매한 단어들까지도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우리의 일상을 성립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에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칸트의 표현으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한겨울 추위 속에서 따뜻한 코트와 옷가지를 모두 빼앗기고 혼자서 방황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순응하고 편안한 일상을 즐기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는 것은 자신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일단 손에서 놓아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실 허위 일지도 모른다', '선악조차도 날조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런 것과 마주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까지만 하자. 결론은 비판적 사고(실수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관점을 바꿔 생각하고, 다양한 사람, 다른 세대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지식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과거의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를 통해 망상적 신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생각이다. (끝) }}}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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